The Meeting of Anthony and Cleopatra,
detail, 1746-47, fresco,
Palazzo Labia, Venice>
끝내 신분과 국적,
동양과 서양이라는 인종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이국의 여왕과 혼인식을 올릴만큼
안토니우스는 철저하게 여왕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결혼 선물로
여왕에게 엄청난 이권이 걸린
오리엔트 지방의 통치권을 주었다.
로마의 권력자를 애인으로 둔 덕분에
그녀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물과 권력을 소유한
여왕이 되었다.

Cleopatra>
사랑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아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고
또 다른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의 지배권을 동서로 양분할 것을 요구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로마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사를 돌보기는 커녕
힘들게 정복한 식민지에서 나온 귀한 수입을
이집트 여인에게 몸땅 안겨주는 사령관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특히 상속자요,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노예로 전락한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수치로 생각했다.
그는 두 남녀를 국가의 명예를 더럽힌 탕아와
국제적인 창녀의 야합으로 매도한 후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의 승자가 되었고,
패전 사령관이 되어 벼랑 끝에 몰린 안토니우스는 자결하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최후를 맞았고,
역사가들은 그녀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클레오파트라를 그릴 때는 독사가 벌거벗은 여왕의 젖가슴을 무는
자극적인 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풍겨 나오는 것은
죽음과 성을 한 쌍으로 묶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The Death of Cleopatra
클레오파트라가 팜므 파탈(Femme Fatale) 의 원형이 된 것은
정치적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의 최정상에 앉은 남자들을 차례로
유혹해 희생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이용해 왕권을 차지했고
애인들의 막강한 힘을 빌어 정적을 제거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플루타르크는 클레오파트라의 신비로운 죽음에 대해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탐스런 무화과 바구니를 든 농부가
여왕을 방문한 직후에 일어났다.
무화과 바구니에
맹독성이 강한 독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라고 강한 의문을 던졌다.
들라크루아는
클레오파트라를 방문한 농부의 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는
뱀을 그려 넣어 극적인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
우리가 클레오파트라 라고 부르는 여왕은
클레오파트라 3세 이다
이집트 왕조에서는 여왕이 제법 있었는데
고대 이집트 역사 연대기 문헌을 보면 클레오파트라의 시대가
제법 있었다. 몇 명의 클레오파트라 라는 이름을 가진 여왕들 중
가장 활약상이 두드러졌던 여왕이 클레오파트라 3세 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