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최씨들이 있는가?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최씨의 인구는 약 200만 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4.8%에 달하는데 최씨의 본관은 326 본관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단순한 지명에 불과하고 시조가 확인되는 최씨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도 모두 현존하는 최씨의 본관이 아니고 상당한 본관이 후손이 없다.
본관 시조 비고
-----------------------------------------------------------------------
간성최씨(杆城崔氏) 최지순(崔之洵) 강릉최씨 최필달의 후손이라고 한다.
강릉최씨(江陵崔氏) 최필달(崔必達) 후손 = 대한민국 대통령 최규하
강릉최씨(江陵崔氏) 최문한(崔文漢)
강릉최씨(江陵崔氏) 최흔봉(崔欣奉) 전주최씨였으나 강릉최씨가 되었다.
강진최씨(康津崔氏) 최택(崔澤) 탐진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강화최씨(江華崔氏) 최익후(崔益厚)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개녕최씨(開寧崔氏) 최연(崔淵) 청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개성최씨(開城崔氏) 최우달(崔佑達) 아들 최응(崔凝)이 개성에 살았다.
거창최씨(居昌崔氏) 최종민(崔宗敏)
경주최씨(慶州崔氏) 최치원(崔致遠) 소벌도리공의 후손이라고 한다.
계림최씨(鷄林崔氏) 최윤순(崔允順)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부최씨(古阜崔氏) 최척(崔陟)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죽최씨(孤竹崔氏) 최치(崔峙) 해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곡강최씨(曲江崔氏) 최호(崔湖) 전주최씨 복야공계의 후손이라고 한다.
광양최씨(光陽崔氏) 최한영(崔漢英) 초계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광주최씨(廣州崔氏) 최득보(崔得寶)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괴산최씨(槐山崔氏) 최세진(崔世珍)
금천최씨(今川崔氏) 최숙정(崔淑精) 양천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길주최씨(吉州崔氏) 최유정(崔有井)
나주최씨(羅州崔氏) 최자호(崔自湖) 탐진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낭주최씨(朗州崔氏) 최흔(崔昕)
대령최씨(大寧崔氏) 최자염(崔子廉)
동주최씨(東州崔氏) 최준옹(崔俊邕) 후손=고려말 장군 최영, 육당 최남선
등주최씨(登州崔氏) 최기열(崔基烈)
무주최씨(茂朱崔氏) 최북(崔北)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문경최씨(聞慶崔氏) 최대규(崔大奎)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밀양최씨(密陽崔氏) 최환(崔環) 경주최씨 화숙공파의 후손이란 설이있다.
보령최씨(保寧崔氏) 최창익(崔昌益)
봉산최씨(鳳山崔氏) 최윤(崔倫)
부안최씨(扶安崔氏) 최창일(崔昌一) 청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삭령최씨(朔寧崔氏) 최천로(崔天老) 후손=조선 세종 때 최항(崔恒)
상원최씨(祥原崔氏) 최응(崔凝) 개성최씨에서 나누어졌다고 한다.
상주최씨(尙州崔氏) 최춘원(崔春元)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서화최씨(瑞和崔氏) 최공철(崔公哲)
성주최씨(星州崔氏) 최맹하(崔孟河)
수성최씨(隋城崔氏) 최영규(崔永奎) 경주김씨로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수원최씨(水原崔氏) 최정(崔靖)
수원최씨(水原崔氏) 최상저(崔尙 )
순천최씨(順天崔氏) 최익(崔瀷) 전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신풍최씨(新豊崔氏) 최만강(崔萬江)
신풍최씨(新豊崔氏) 최순(崔珣)
아산최씨(牙山崔氏) 최예입(崔禮立) 해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안동최씨(安東崔氏) 최광윤(崔光胤) 고려 평장사 문영공 최언위의 큰아들이다.
양주최씨(楊洲崔氏) 최억(崔億)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양천최씨(陽川崔氏) 최원(崔遠) 전주최씨 문열공 최순작의 후손이라고 한다.
연풍최씨(延豊崔氏) 최지강(崔至崗)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영광최씨(靈光崔氏) 최산보(崔山甫)
영암최씨(靈巖崔氏) 최홍의(崔洪儀)
영천최씨(永川崔氏) 최한(崔漢) 전주최씨 복야공 최균의 후손이라고 한다.
영흥최씨(永興崔氏) 최지미(崔之美)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완산최씨(完山崔氏) 최수강(崔秀崗) 전주최씨 문성공 최아의 후손이라 한다.
용강최씨(龍岡崔氏) 최지무(崔枝茂) 청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용궁최씨(龍宮崔氏) 최현(崔玄) 해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용주최씨(龍州崔氏) 최광(崔光) 대녕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우봉최씨(牛峰崔氏) 최원호(崔元浩)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원주최씨(原州崔氏) 최보은(崔寶隱)
의주최씨(義州崔氏) 최효일(崔孝一)
전의최씨(全義崔氏) 최수경(崔守慶)
전주최씨(全州崔氏) 최순작(崔舜爵) 중국 당나라 청하에서 왔다고 한다.
전주최씨(全州崔氏) 최균(崔均) 중국 당나라 청하에서 왔다고 한다.
전주최씨(全州崔氏) 최아(崔阿) 중국 당나라 청하에서 왔다고 한다.
전주최씨(全州崔氏) 최군옥(崔群玉) 경상도 상산(尙山)에서 왔다고 한다.
정주최씨(貞州崔氏) 최인저(崔仁沮)
죽산최씨(竹山崔氏) 최서(崔 ) 해주최씨 최충의 후손이라고 한다.
중원최씨(中原崔氏) 최홍사(崔弘嗣)
직산최씨(稷山崔氏) 최홍재(崔弘宰)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진산최씨(珍山崔氏) 최개(崔漑) 전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진주최씨(晋州崔氏) 최정(崔精)
창녕최씨(昌寧최씨) 최종번(崔宗番)
천령최씨(川寧崔氏) 최흥(崔興)
청송최씨(靑松崔氏) 최경(崔京) 해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청주최씨(淸州崔氏) 최기우(崔基遇)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초계최씨(草溪崔氏) 최용궁(崔龍宮) 전주최씨 문열공 최순작의 후손이라고 한다.
충주최씨(忠州崔氏) 최승(崔陞) 중국 당나라 청하에서 왔다고 한다.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철(崔哲) 상조(上祖)지만 세대가 연결되지 않는다.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응규(崔應奎)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준량(崔俊良)
탐진최씨(耽津崔氏) 최효노(崔孝老)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윤덕(崔允德)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총(崔聰)
탐진최씨(耽津崔氏) 최홍건(崔弘建)
탐진최씨(耽津崔氏) 최민상(崔 祥)
태원최씨(太原崔氏) 최산령(崔令山) 중국 명나라 만력 17년 중국에서 왔다.
태인최씨(泰仁崔氏) 최용전(崔勇田)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통천최씨(通川崔氏) 최경현(崔景賢)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평창최씨(平昌崔氏) 최유혁(崔有奕)
풍천최씨(豊川崔氏) 최언영(崔彦英)
하양최씨(河陽崔氏) 최원정(崔源鼎)
한남최씨(漢南崔氏) 최홍행(崔洪 )
함양최씨(咸陽崔氏) 최인(崔寅)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함열최씨(咸悅崔氏) 최호(崔浩)
해주최씨(海州崔氏) 최온(崔溫) 후손 = 해동공자 최충, 조선 세종 때 최만리
화순최씨(和順崔氏) 최부(崔溥) 고려 문하평장사 최계(崔桂)를 1세로 한다.
황주최씨(黃州崔氏) 최남혁(崔南赫) 전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회령최씨(會寧崔氏) 최신(崔愼)
흥해최씨(興海崔氏) 최호(崔湖) 전주최씨 복야공 최균의 10세손이라고 한다.
*** 비고에 적힌 "누구의 후손이라고 한다"는 기록은
대체로 "최씨경주대동기원설"을 근거로 하고 있어서
그대로 믿기 어렵다.
해설 :
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857년(신라 헌안왕 1년)에 태어난 신라 말기의 학자로 자는 고운(孤雲)이다.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라고 하기도 한다. 12세에 당(唐)나라에 유학(留學)하여 17세에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승무랑시어사 내봉공이 되어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879년(신라 헌강왕 5년) 황소의 난에 출전하여 격문을 써서 이름을 떨쳤다. 28세에 귀국하여 893년(진성왕 7년) 견당사에 임명되었으나 도둑이 횡행하여 가지 못하고 이듬해에 시무십여조를 만들어 아찬이 되었다.
공은 난세를 한탄하며 전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경남 합천의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공의 제자 중에는 고려에서 벼슬을 한 사람이 많았고 신당서 예문지에 공의 사륙집(四六集)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봉암사 비문, 숭복사 비문, 석순응전 등이 유명하다.
경남 하동의 쌍계사에 있는 국보 47호 진감선사비의 비문은 공이 지은 것이다.
소벌도리공.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조에는 "시조는 성이 박씨요 휘는 혁거세이다......고허촌 촌장 소벌도리공(소벌공 이라고 하기도 한다)이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 이라는 우물(井) 옆 숲(林) 사이에서 말(馬)이 무릎(膝)을 꿇고 울고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가까이 가 보았더니 어느새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卵) 하나가 있어서 그 알을 깨어보니 어린아이(兒)가 나와(出) 데려다가 길렀다. 이 아이의 나이가 10여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였고 6부의 사람들은 그의 출생이 신기하다 하여 존경하며 따르다가 이에 이르러 임금으로 세웠다......."라고 되어있다.
한편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옛날 진한 땅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둘째는 돌산 고허촌이니 촌장은 소벌도리이다. 처음에 형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라고 부르는 곳으로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등 남쪽 마을이 여기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이다. 이하 모두 같다)........"라고 했다.
또 삼국사기 신라 본기 유리이사금조에 "유리 이사금 9년 봄에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그들에게 각각 성(姓)을 주었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치고 그 성을 이씨로 하였으며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치고 그 성을 최씨로 하였으며 대수부는 점량부(모부 라고도 함)로 고치고 그 성을 손씨로 하였으며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치고 그 성을 정씨로 하였으며 가리부는 한비부로 고치고 그 성을 배씨로 하였으며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치고 그 성을 설씨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여 소벌도리공의 후손인 고허부를 사량부로 고치고 그들에게 최씨 성을 주었다고 했다.
한편 소벌도리공의 선조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이보다 앞서 고조선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아 여섯 개 마을을 이루었으니...."라고 설명하여 소벌도리공을 비롯한 여섯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고조선의 유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최영(崔塋)
1316-1388. 고려 말기의 명장. 여러 번 왜구를 크게 격파하여 왜구들이 "백수 최만호(白首崔萬戶)"라고 불렀다고 한다. 철령위 문제로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 시켰으나 부하 이성계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란을 일으켜 이성계에 잡혀 고양으로 유배 된 후 죽음을 당했다.
그는 죽을 때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면 무덤에 풀이 않날 것이라고 말했는데 지금도 무덤에 풀이 나지 않고 붉은 무덤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최항(崔恒)
1409-1474. 조선 세조 때 문신.
1434년(세종 16년) 문과에 급제 1443년 집현전 학사로 정인지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으며 다시 용비어천가를 주해했다. 계유정란에 참여하여 정란 1등공신이 되었고 1466년 영의정이 되었다.
최광윤(崔光胤)
문영공 최언위의 큰아들. 고려 초기의 충신으로 진(晉)나라에 유학하던 중 거란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의 재주를 인정받아 거란에서 관리가 되었다. 이 때 거란이 고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준비함을 보고 비밀리에 고려에 보고하여 고려 정종이 30만 대군으로 광군(光軍)을 창설하여 서경에 주둔시켜 이에 대비하게 했다.
최씨의유래(두산세계대백과)
본관은 문헌에 대략 30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거의가 지명뿐, 그 중 시조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것은 불과 40여 본이다. 주요한 본관은 경주(慶州) ·계림(鷄林) ·전주(全州) ·동주(東州:철원) ·해주(海州) ·삭녕(朔寧) ·강릉(江陵) ·화순(和順) ·강화(江華) ·영천(永川) ·탐진(耽津:康津) ·수원(水原) ·영흥(永興) ·수성(隋城) ·우봉(牛峰:金川) ·충주(忠州) 등이다. 최씨는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 역사에서 숱한 명신 ·학자 ·문인을 배출한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적 명문거족이다.
최씨의 원조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서라벌, BC 50?) 6촌(村) 중의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沙梁郡)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6부(部) 촌장들은 모두 천강인(天降人)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6촌에 6성(李 ·崔 ·孫 ·鄭 ·裵 ·薛)을 각각 사성(賜姓)한 것이 32년(신라 유리왕 9)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최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24세손)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최씨의 관향(貫鄕) 분파가 최치원을 1세로 하는 경주최씨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동조동근(同祖同根)을 주장하는 최씨의 전모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그 선대 세계(世系) 및 분파 연원을 체계화한 《경주최씨상계세보(慶州崔氏上系世譜)》를 통해 그 대강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 세보에 따르면 최치원은 소벌도리의 23대손이 되는데, 최치원의 전대(前代)에서 분파한 관향으로 개성 ·삭녕 ·동주 최씨와 전주최씨의 일파가 있고, 최치원의 장손(長孫)인 승로(承老)의 후손에서 함양(咸陽) ·청주(淸州) ·영흥 ·충주 ·용강 ·수원 ·부안(扶安) ·강릉 ·강화 ·화순 ·통천(通川) ·양주(楊州) ·원주(原州) 최씨 등이 분파되었으며, 이 밖에 해주 ·진주(晉州) ·탐진 최씨가 최치원의 지손(支孫)에서 분파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세보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아 최근에 나온 《아동최씨고(我東崔氏考)》에서는 많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와 최치원을 잇는 신라인의 후예가 된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는 것 같다. 신라 말기의 치원 ·승우(承祐) ·언위(彦) 등 3인이 똑같이 당(唐)나라에 유학,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와 문명(文名)을 날려 ‘일대삼최(一代三崔)’라 불렸거니와 특히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최고의 번영을 누렸는데, 그 중에서도 해주최씨와 우봉최씨가 특히 세력을 떨쳤다. 최씨는 신라 ·고려시대에 명망을 높이고 권세를 누린 최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의외로 쇠침하여 겨우 상신 7명, 대제학(大提學) 4명, 문과급제자 437명을 배출하였다. 오늘날 127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960년도 국세조사에 보면 총 20만 4154가구에 인구 119만 2662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4위였으며, 85년도 조사에서도 가구수 45만 4696가구, 191만 3322명으로 전국 274성 중 역시 제4위였다.
【경주최씨】 대종(大宗)인 경주최씨는 신라의 석학 최치원을 시조로 한다. 그는 한문학의 조종(祖宗)으로서 절세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 등의 명저를 남겼다. 경주최씨는 신라 말에 명성을 떨쳤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성종 때의 승로(承老:수문하시중), 현종 때의 항(沆:평장사), 충숙왕 때의 해(瀣), 명종 때의 여해(汝諧)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퇴조를 보여 겨우 문과에 42명을 배출하였을 뿐, 역대 상신 ·대제학 가운데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경주최씨의 세계(世系)는 최치원을 시조로 26파로 나뉘는데, 그 중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광정공파(匡靖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 ·충렬공파(忠烈公派) 등 6대파가 주축을 이룬다. 이들 6파 가운데서 역사적 인물을 보면, 사성공(司成公) 눌(汭)의 후손인 제우(濟愚)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동학(東學)의 창시자로 유명하며, 동학의 제2대 교주가 된 시형(時亨)은 종수(宗秀)의 아들이다. 그리고 한말의 거유(巨儒)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단식으로 일생을 마친 익현(益鉉)이 있다. 경주시 교동(校洞)에는 ‘최부자’로 이름난 준(浚)의 집이 있는데 이 ‘최부잣집’은 ‘12대 만석(萬石), 10대 진사(進士)’로 유명하다.
【전주최씨】 전주최씨는 계보가 복잡하다. 최균(崔均)을 시조로 하는 파와 최군옥(崔群玉)을 시조로 하는 일파, 또 최아(崔阿)를 시조로 하는 파가 있는데 세보에 따르면 균은 치원의 지손이요, 군옥은 동주최씨의 시조 준옹(俊邕)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인물은 최균파(派)에서 나왔다. 위의 3파를 합하여 전주최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3명, 대제학 2명, 청백리 3명, 문과급제자 109명을 배출하여 최씨 중에서 가장 빼어났다. 중흥(中興)의 조(祖)로는 유경(有慶)을 들 수 있다. 상신 ·대제학 ·청백리가 모두 그의 자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대표적 인물은 명길(鳴吉)인데, 그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1등공신으로 대제학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석정(錫鼎:숙종 때 영의정) ·석항(錫恒:경종 때 좌의정) 형제도 정승을 지냈다. 특히 석정은 당시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당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6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한편 군옥의 후손으로는 고려 말기의 절신(節臣)으로 《두문동(杜門洞) 72현록(賢錄)》에도 들어 있는 양(瀁)이 있다. 그 밖의 인물로는 고려 말기의 좌참찬 부(府), 태종 때의 예문관 직제학 덕지(德之), 선조 때의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철견(鐵堅) 등이 있고,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크게 활약한 기필(琦弼) ·균(均) ·경행(敬行) 등도 있다. 전주최씨는 경기 화성(華城), 전북 남원(南原) ·김제(金堤) ·부안, 전남 영암(靈巖) 등에 동족부락을 이루고 있다.
【동주최씨】 철원(鐵原)최씨라고도 하는데, 동주(東州)는 철원의 고려 때 지명이다.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최준옹(崔俊邕)이다. 고려 말기의 최영(崔瑩)을 고비로 조선시대에는 두드러진 인물이 없다. 준옹의 현손 석(奭)의 아들로,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낸 유청(惟淸) 때부터 가문이 번창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들 당()과 선(詵)이 유명하다. 당은 신종 때 문하평장사를 지냈고, 선은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고려 말기의 명장 영은 유청의 현손이며 동원부원군 원직(元直)의 아들이다. 그는 강직청렴한 명장이요 명재상으로서 왜구를 무찔러 전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10여 차례에 걸친 왜구 소탕과 함께 수차례의 내란에 공을 세웠으나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李成桂)의 군사와 맞섰다가 결국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현대의 인물로는 국학(國學)의 대가 남선(南善)이 유명하다.
【해주최씨】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알려진 충(沖)의 아버지 온(溫)을 시조로 한다. 온은 해주 여러 대에 걸쳐 목민관(牧民官)을 지낸 후 해주의 수양산(首陽山) 아래서 세거(世居)했었다. 해주최씨는 고려시대에 많은 학자 ·명신을 배출하였고,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45명을 냈다. 대표적 인물은 동방 유학의 비조(鼻祖)인 충으로, 그가 개경(개성)에서 연 구재학당(九齋學堂)은 한국 사학(私學)의 효시가 되는데, 수많은 영재를 배출하여 오늘날까지 ‘해동공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충의 아들 유선(惟善)과 유길(惟吉) 형제 역시 당대의 뛰어난 인물들이다. 5대손 윤의(允儀)는 예학(禮學)에 밝아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50권)을 편찬하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인물로는 세종 때의 학자요 청백리인 만리(萬理)가 있는데, 그는 충의 12대손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반대한 일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 밖에 시와 문장에 뛰어났던 경창(慶昌),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황(滉)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 배출한 유일한 영의정 규서(奎瑞)가 있다.
【삭녕최씨】 고려 명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최유가(崔兪嘉)를 시조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영의정 2명, 대제학 1명, 문과 급제자 32명을 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항(恒) ·흥원(興源) ·한기(漢綺) 등이 있다. 항은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영의정을 두 차례나 역임하였다. 흥원은 항의 증손으로 선조 때 유성룡(柳成龍)의 뒤를 이어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조선 실학의 거두인 한기는 항의 14대손으로, 영 ·정조 때에 융성했던 실학이 학문으로서 이론적 ·사상적으로 미숙하던 것을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무실사상(務實思想)을 전개하여 실학의 체계를 확립한 학자이다. 사가(史家)들이 그를 가리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가교자(架橋者)’라 평할 만큼 그는 한국 사상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삭녕최씨는 주로 경남지방에 많이 살고 있는데, 특히 사천군 사천면(泗川面) ·정동면(正東面) ·사남면(泗南面) 일대에 특색 있는 동족부락을 이루고 있다.
【강릉최씨】 고려시대의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하고 있다. 《경주최씨상계세보》에 보면, 그는 경주최씨의 시조 치원의 후손인 승로(承老)의 증손이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32명으로 전주 ·해주 ·경주 최씨에 다음가는 숫자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치운(致雲)과 수성(壽城)을 들 수 있다. 치운은 시조 필달의 16대손으로 세종 때의 명신이었으며 특히 형옥(刑獄)에 밝아 왕명을 받고 《무원록(無寃錄)》을 주석하였다. 수성은 치운의 증손으로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시문 ·서화 ·음률 ·수리(數理) 등 다방면에 뛰어난 당대의 기재절필(奇才絶筆)이었다. 강릉최씨에는 시조를 달리하는 일파가 있으니 그 시조는 고려 충숙왕의 부마(駙馬)인 문한(文漢)이다. 그는 고려 말기에 강릉으로 낙향했는데, 그 자손들이 강릉과 충북 충주에 문호(門戶)를 열어 현재 삼척 ·양양 ·평창 등지에 수천 호가 거주하고 있다. 주요인물로는 조선 세조 때 이조참판을 지낸 자점(自霑),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세건(世楗), 인조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응천(應天) 등이 있다.
【화순최씨】 시조는 《조선씨족통보》 등에 고려시대의 최언(崔堰)으로 되어 있으나 《화순최씨세보》에는 계대(系代)를 알 수 없는 언의 원조(遠祖) 세기(世基)로 되어 있다. 세계는 언에서부터 확실히 나와 있다. 그의 아들이 계신(繼臣)인데, 계신의 두 아들 영호(永浩)와 영유(永濡) 대에서 2파로 갈라졌다. 영호는 고려 충렬왕 때 좌우위 보승산원(左右衛保勝散員)을 지냈고, 영유는 공민왕 때 해주목사를 지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당대의 저명한 성리학자로 대사헌(大司憲)이 추증된 영경(永慶)이 있다.
【강화최씨】 고려시대 사복시소경(司僕寺少卿)을 지낸 최익후(崔益厚)를 시조로 하며, 고려 말기∼조선 초기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용소(龍蘇)가 있다. 그는 고려시대에 공조전서(工曹典書) 등을 지냈고, 조선 태조 때에는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잡혀간 본국인 570명을 데리고 나왔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을 거쳐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 태조로부터 ‘관서부자(關西夫子)’의 칭호를 받았다. 그 밖에 중종 때 대사간을 지낸 순(淳), 선조 때의 임진왜란에 전공을 세운 시성(時聖) ·희립(希立) 등이 있다.
【영천최씨】 고려 중기의 공신 최한(崔漢)을 시조로 한다. 한은 전주최씨의 시조 균의 9대손으로, 전주최씨에서 분적한 분파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세종 때 서예가로 유명한 흥효(興孝)가 있다. 그는 홍문관 제학을 지냈으며 예서와 초서를 잘 썼다. 흥효의 후손에서 영천최씨는 12파로 갈린다. 고려 말기의 유명한 인물로는 발명가 무선(茂宣)이 있는데, 그는 원(元)나라의 화약 기술자로부터 기술을 배워 그 제조법을 익혔으며 조정에 건의, 화통도감(火都監)을 설치케 하고 그 책임자가 되어 화포 ·화전 ·화통 등의 화기를 만들어 때마침 쳐들어 온 왜구의 선박 500여 척을 전멸시켰다. 1401년(태종 1) 조선의 화기 보유량은 화약 4근 4냥, 화기 200여 병(柄)이던 것을 그가 관장한 뒤 19년(세종 1)에는 화약 6,900여 근, 화기 1만 3500여 병, 화포발사군 1만여 명이라는 놀라운 숫자로 발전시켰다.
【탐진최씨】 고려 인종 때의 공신 최사전(崔思全)을 시조로 하고 그의 두 아들 변(弁) ·효인(孝仁) 이하를 실전(失傳)하여 세거지(世居地)의 이름을 따서 각파의 중시조를 1세로 삼고 있다. 사전은 예종의 내의(內醫)로서 척준경(拓俊京)으로 하여금 이자겸(李資謙)을 제거케 하고 병부상서에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이 된 인물이다. 각 세거지별 분파를 보면 화성파 ·강진금천파(康津錦川派) ·만경파(萬頃派)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 ·금남파(錦南派) ·만경율리파(萬頃栗里派) 등이며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5명을 배출하였다. 그 외에도 주요 분파로는 수성최씨(시조 永奎:戶長 ·隋城伯) ·수원최씨(시조 尙:戶長) ·우봉최씨(시조 元浩:上將軍 ·門下侍中) ·충주최씨(시조 陞:兵馬使) ·통천최씨(시조 景賢:監察御史) ·양천(陽川)최씨(시조 遠:密直副使) ·개성(開城)최씨(시조 佑達:大相) ·직산(稷山)최씨(시조 弘宰:門下侍郞平章事) ·용주(龍州) 최씨(시조 光:副戶長) ·흥해(興海) 최씨(시조 湖:檢校大將軍) ·양주(楊州) 최씨(시조 億:戶部尙書) ·낭주(朗州)최씨(시조 昕:元輔相) ·초계(草溪)최씨(시조 龍宮:世子太傳) 등이 있다.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최씨의 인구는 약 200만 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4.8%에 달하는데 최씨의 본관은 326 본관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단순한 지명에 불과하고 시조가 확인되는 최씨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도 모두 현존하는 최씨의 본관이 아니고 상당한 본관이 후손이 없다.
본관 시조 비고
-----------------------------------------------------------------------
간성최씨(杆城崔氏) 최지순(崔之洵) 강릉최씨 최필달의 후손이라고 한다.
강릉최씨(江陵崔氏) 최필달(崔必達) 후손 = 대한민국 대통령 최규하
강릉최씨(江陵崔氏) 최문한(崔文漢)
강릉최씨(江陵崔氏) 최흔봉(崔欣奉) 전주최씨였으나 강릉최씨가 되었다.
강진최씨(康津崔氏) 최택(崔澤) 탐진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강화최씨(江華崔氏) 최익후(崔益厚)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개녕최씨(開寧崔氏) 최연(崔淵) 청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개성최씨(開城崔氏) 최우달(崔佑達) 아들 최응(崔凝)이 개성에 살았다.
거창최씨(居昌崔氏) 최종민(崔宗敏)
경주최씨(慶州崔氏) 최치원(崔致遠) 소벌도리공의 후손이라고 한다.
계림최씨(鷄林崔氏) 최윤순(崔允順)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부최씨(古阜崔氏) 최척(崔陟)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죽최씨(孤竹崔氏) 최치(崔峙) 해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곡강최씨(曲江崔氏) 최호(崔湖) 전주최씨 복야공계의 후손이라고 한다.
광양최씨(光陽崔氏) 최한영(崔漢英) 초계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광주최씨(廣州崔氏) 최득보(崔得寶)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괴산최씨(槐山崔氏) 최세진(崔世珍)
금천최씨(今川崔氏) 최숙정(崔淑精) 양천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길주최씨(吉州崔氏) 최유정(崔有井)
나주최씨(羅州崔氏) 최자호(崔自湖) 탐진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낭주최씨(朗州崔氏) 최흔(崔昕)
대령최씨(大寧崔氏) 최자염(崔子廉)
동주최씨(東州崔氏) 최준옹(崔俊邕) 후손=고려말 장군 최영, 육당 최남선
등주최씨(登州崔氏) 최기열(崔基烈)
무주최씨(茂朱崔氏) 최북(崔北)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문경최씨(聞慶崔氏) 최대규(崔大奎)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밀양최씨(密陽崔氏) 최환(崔環) 경주최씨 화숙공파의 후손이란 설이있다.
보령최씨(保寧崔氏) 최창익(崔昌益)
봉산최씨(鳳山崔氏) 최윤(崔倫)
부안최씨(扶安崔氏) 최창일(崔昌一) 청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삭령최씨(朔寧崔氏) 최천로(崔天老) 후손=조선 세종 때 최항(崔恒)
상원최씨(祥原崔氏) 최응(崔凝) 개성최씨에서 나누어졌다고 한다.
상주최씨(尙州崔氏) 최춘원(崔春元)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서화최씨(瑞和崔氏) 최공철(崔公哲)
성주최씨(星州崔氏) 최맹하(崔孟河)
수성최씨(隋城崔氏) 최영규(崔永奎) 경주김씨로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수원최씨(水原崔氏) 최정(崔靖)
수원최씨(水原崔氏) 최상저(崔尙 )
순천최씨(順天崔氏) 최익(崔瀷) 전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신풍최씨(新豊崔氏) 최만강(崔萬江)
신풍최씨(新豊崔氏) 최순(崔珣)
아산최씨(牙山崔氏) 최예입(崔禮立) 해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안동최씨(安東崔氏) 최광윤(崔光胤) 고려 평장사 문영공 최언위의 큰아들이다.
양주최씨(楊洲崔氏) 최억(崔億)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양천최씨(陽川崔氏) 최원(崔遠) 전주최씨 문열공 최순작의 후손이라고 한다.
연풍최씨(延豊崔氏) 최지강(崔至崗)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영광최씨(靈光崔氏) 최산보(崔山甫)
영암최씨(靈巖崔氏) 최홍의(崔洪儀)
영천최씨(永川崔氏) 최한(崔漢) 전주최씨 복야공 최균의 후손이라고 한다.
영흥최씨(永興崔氏) 최지미(崔之美)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완산최씨(完山崔氏) 최수강(崔秀崗) 전주최씨 문성공 최아의 후손이라 한다.
용강최씨(龍岡崔氏) 최지무(崔枝茂) 청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용궁최씨(龍宮崔氏) 최현(崔玄) 해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용주최씨(龍州崔氏) 최광(崔光) 대녕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우봉최씨(牛峰崔氏) 최원호(崔元浩)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원주최씨(原州崔氏) 최보은(崔寶隱)
의주최씨(義州崔氏) 최효일(崔孝一)
전의최씨(全義崔氏) 최수경(崔守慶)
전주최씨(全州崔氏) 최순작(崔舜爵) 중국 당나라 청하에서 왔다고 한다.
전주최씨(全州崔氏) 최균(崔均) 중국 당나라 청하에서 왔다고 한다.
전주최씨(全州崔氏) 최아(崔阿) 중국 당나라 청하에서 왔다고 한다.
전주최씨(全州崔氏) 최군옥(崔群玉) 경상도 상산(尙山)에서 왔다고 한다.
정주최씨(貞州崔氏) 최인저(崔仁沮)
죽산최씨(竹山崔氏) 최서(崔 ) 해주최씨 최충의 후손이라고 한다.
중원최씨(中原崔氏) 최홍사(崔弘嗣)
직산최씨(稷山崔氏) 최홍재(崔弘宰)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진산최씨(珍山崔氏) 최개(崔漑) 전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진주최씨(晋州崔氏) 최정(崔精)
창녕최씨(昌寧최씨) 최종번(崔宗番)
천령최씨(川寧崔氏) 최흥(崔興)
청송최씨(靑松崔氏) 최경(崔京) 해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청주최씨(淸州崔氏) 최기우(崔基遇)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초계최씨(草溪崔氏) 최용궁(崔龍宮) 전주최씨 문열공 최순작의 후손이라고 한다.
충주최씨(忠州崔氏) 최승(崔陞) 중국 당나라 청하에서 왔다고 한다.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철(崔哲) 상조(上祖)지만 세대가 연결되지 않는다.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응규(崔應奎)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준량(崔俊良)
탐진최씨(耽津崔氏) 최효노(崔孝老)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윤덕(崔允德)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총(崔聰)
탐진최씨(耽津崔氏) 최홍건(崔弘建)
탐진최씨(耽津崔氏) 최민상(崔 祥)
태원최씨(太原崔氏) 최산령(崔令山) 중국 명나라 만력 17년 중국에서 왔다.
태인최씨(泰仁崔氏) 최용전(崔勇田)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통천최씨(通川崔氏) 최경현(崔景賢)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평창최씨(平昌崔氏) 최유혁(崔有奕)
풍천최씨(豊川崔氏) 최언영(崔彦英)
하양최씨(河陽崔氏) 최원정(崔源鼎)
한남최씨(漢南崔氏) 최홍행(崔洪 )
함양최씨(咸陽崔氏) 최인(崔寅)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함열최씨(咸悅崔氏) 최호(崔浩)
해주최씨(海州崔氏) 최온(崔溫) 후손 = 해동공자 최충, 조선 세종 때 최만리
화순최씨(和順崔氏) 최부(崔溥) 고려 문하평장사 최계(崔桂)를 1세로 한다.
황주최씨(黃州崔氏) 최남혁(崔南赫) 전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회령최씨(會寧崔氏) 최신(崔愼)
흥해최씨(興海崔氏) 최호(崔湖) 전주최씨 복야공 최균의 10세손이라고 한다.
*** 비고에 적힌 "누구의 후손이라고 한다"는 기록은
대체로 "최씨경주대동기원설"을 근거로 하고 있어서
그대로 믿기 어렵다.
해설 :
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857년(신라 헌안왕 1년)에 태어난 신라 말기의 학자로 자는 고운(孤雲)이다.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라고 하기도 한다. 12세에 당(唐)나라에 유학(留學)하여 17세에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승무랑시어사 내봉공이 되어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879년(신라 헌강왕 5년) 황소의 난에 출전하여 격문을 써서 이름을 떨쳤다. 28세에 귀국하여 893년(진성왕 7년) 견당사에 임명되었으나 도둑이 횡행하여 가지 못하고 이듬해에 시무십여조를 만들어 아찬이 되었다.
공은 난세를 한탄하며 전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경남 합천의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공의 제자 중에는 고려에서 벼슬을 한 사람이 많았고 신당서 예문지에 공의 사륙집(四六集)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봉암사 비문, 숭복사 비문, 석순응전 등이 유명하다.
경남 하동의 쌍계사에 있는 국보 47호 진감선사비의 비문은 공이 지은 것이다.
소벌도리공.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조에는 "시조는 성이 박씨요 휘는 혁거세이다......고허촌 촌장 소벌도리공(소벌공 이라고 하기도 한다)이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 이라는 우물(井) 옆 숲(林) 사이에서 말(馬)이 무릎(膝)을 꿇고 울고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가까이 가 보았더니 어느새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卵) 하나가 있어서 그 알을 깨어보니 어린아이(兒)가 나와(出) 데려다가 길렀다. 이 아이의 나이가 10여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였고 6부의 사람들은 그의 출생이 신기하다 하여 존경하며 따르다가 이에 이르러 임금으로 세웠다......."라고 되어있다.
한편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옛날 진한 땅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둘째는 돌산 고허촌이니 촌장은 소벌도리이다. 처음에 형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라고 부르는 곳으로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등 남쪽 마을이 여기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이다. 이하 모두 같다)........"라고 했다.
또 삼국사기 신라 본기 유리이사금조에 "유리 이사금 9년 봄에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그들에게 각각 성(姓)을 주었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치고 그 성을 이씨로 하였으며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치고 그 성을 최씨로 하였으며 대수부는 점량부(모부 라고도 함)로 고치고 그 성을 손씨로 하였으며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치고 그 성을 정씨로 하였으며 가리부는 한비부로 고치고 그 성을 배씨로 하였으며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치고 그 성을 설씨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여 소벌도리공의 후손인 고허부를 사량부로 고치고 그들에게 최씨 성을 주었다고 했다.
한편 소벌도리공의 선조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이보다 앞서 고조선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아 여섯 개 마을을 이루었으니...."라고 설명하여 소벌도리공을 비롯한 여섯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고조선의 유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최영(崔塋)
1316-1388. 고려 말기의 명장. 여러 번 왜구를 크게 격파하여 왜구들이 "백수 최만호(白首崔萬戶)"라고 불렀다고 한다. 철령위 문제로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 시켰으나 부하 이성계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란을 일으켜 이성계에 잡혀 고양으로 유배 된 후 죽음을 당했다.
그는 죽을 때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면 무덤에 풀이 않날 것이라고 말했는데 지금도 무덤에 풀이 나지 않고 붉은 무덤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최항(崔恒)
1409-1474. 조선 세조 때 문신.
1434년(세종 16년) 문과에 급제 1443년 집현전 학사로 정인지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으며 다시 용비어천가를 주해했다. 계유정란에 참여하여 정란 1등공신이 되었고 1466년 영의정이 되었다.
최광윤(崔光胤)
문영공 최언위의 큰아들. 고려 초기의 충신으로 진(晉)나라에 유학하던 중 거란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의 재주를 인정받아 거란에서 관리가 되었다. 이 때 거란이 고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준비함을 보고 비밀리에 고려에 보고하여 고려 정종이 30만 대군으로 광군(光軍)을 창설하여 서경에 주둔시켜 이에 대비하게 했다.
최씨의유래(두산세계대백과)
본관은 문헌에 대략 30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거의가 지명뿐, 그 중 시조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것은 불과 40여 본이다. 주요한 본관은 경주(慶州) ·계림(鷄林) ·전주(全州) ·동주(東州:철원) ·해주(海州) ·삭녕(朔寧) ·강릉(江陵) ·화순(和順) ·강화(江華) ·영천(永川) ·탐진(耽津:康津) ·수원(水原) ·영흥(永興) ·수성(隋城) ·우봉(牛峰:金川) ·충주(忠州) 등이다. 최씨는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 역사에서 숱한 명신 ·학자 ·문인을 배출한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적 명문거족이다.
최씨의 원조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서라벌, BC 50?) 6촌(村) 중의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沙梁郡)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6부(部) 촌장들은 모두 천강인(天降人)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6촌에 6성(李 ·崔 ·孫 ·鄭 ·裵 ·薛)을 각각 사성(賜姓)한 것이 32년(신라 유리왕 9)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최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24세손)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최씨의 관향(貫鄕) 분파가 최치원을 1세로 하는 경주최씨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동조동근(同祖同根)을 주장하는 최씨의 전모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그 선대 세계(世系) 및 분파 연원을 체계화한 《경주최씨상계세보(慶州崔氏上系世譜)》를 통해 그 대강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 세보에 따르면 최치원은 소벌도리의 23대손이 되는데, 최치원의 전대(前代)에서 분파한 관향으로 개성 ·삭녕 ·동주 최씨와 전주최씨의 일파가 있고, 최치원의 장손(長孫)인 승로(承老)의 후손에서 함양(咸陽) ·청주(淸州) ·영흥 ·충주 ·용강 ·수원 ·부안(扶安) ·강릉 ·강화 ·화순 ·통천(通川) ·양주(楊州) ·원주(原州) 최씨 등이 분파되었으며, 이 밖에 해주 ·진주(晉州) ·탐진 최씨가 최치원의 지손(支孫)에서 분파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세보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아 최근에 나온 《아동최씨고(我東崔氏考)》에서는 많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와 최치원을 잇는 신라인의 후예가 된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는 것 같다. 신라 말기의 치원 ·승우(承祐) ·언위(彦) 등 3인이 똑같이 당(唐)나라에 유학,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와 문명(文名)을 날려 ‘일대삼최(一代三崔)’라 불렸거니와 특히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최고의 번영을 누렸는데, 그 중에서도 해주최씨와 우봉최씨가 특히 세력을 떨쳤다. 최씨는 신라 ·고려시대에 명망을 높이고 권세를 누린 최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의외로 쇠침하여 겨우 상신 7명, 대제학(大提學) 4명, 문과급제자 437명을 배출하였다. 오늘날 127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960년도 국세조사에 보면 총 20만 4154가구에 인구 119만 2662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4위였으며, 85년도 조사에서도 가구수 45만 4696가구, 191만 3322명으로 전국 274성 중 역시 제4위였다.
【경주최씨】 대종(大宗)인 경주최씨는 신라의 석학 최치원을 시조로 한다. 그는 한문학의 조종(祖宗)으로서 절세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 등의 명저를 남겼다. 경주최씨는 신라 말에 명성을 떨쳤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성종 때의 승로(承老:수문하시중), 현종 때의 항(沆:평장사), 충숙왕 때의 해(瀣), 명종 때의 여해(汝諧)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퇴조를 보여 겨우 문과에 42명을 배출하였을 뿐, 역대 상신 ·대제학 가운데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경주최씨의 세계(世系)는 최치원을 시조로 26파로 나뉘는데, 그 중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광정공파(匡靖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 ·충렬공파(忠烈公派) 등 6대파가 주축을 이룬다. 이들 6파 가운데서 역사적 인물을 보면, 사성공(司成公) 눌(汭)의 후손인 제우(濟愚)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동학(東學)의 창시자로 유명하며, 동학의 제2대 교주가 된 시형(時亨)은 종수(宗秀)의 아들이다. 그리고 한말의 거유(巨儒)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단식으로 일생을 마친 익현(益鉉)이 있다. 경주시 교동(校洞)에는 ‘최부자’로 이름난 준(浚)의 집이 있는데 이 ‘최부잣집’은 ‘12대 만석(萬石), 10대 진사(進士)’로 유명하다.
【전주최씨】 전주최씨는 계보가 복잡하다. 최균(崔均)을 시조로 하는 파와 최군옥(崔群玉)을 시조로 하는 일파, 또 최아(崔阿)를 시조로 하는 파가 있는데 세보에 따르면 균은 치원의 지손이요, 군옥은 동주최씨의 시조 준옹(俊邕)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인물은 최균파(派)에서 나왔다. 위의 3파를 합하여 전주최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3명, 대제학 2명, 청백리 3명, 문과급제자 109명을 배출하여 최씨 중에서 가장 빼어났다. 중흥(中興)의 조(祖)로는 유경(有慶)을 들 수 있다. 상신 ·대제학 ·청백리가 모두 그의 자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대표적 인물은 명길(鳴吉)인데, 그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1등공신으로 대제학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석정(錫鼎:숙종 때 영의정) ·석항(錫恒:경종 때 좌의정) 형제도 정승을 지냈다. 특히 석정은 당시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당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6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한편 군옥의 후손으로는 고려 말기의 절신(節臣)으로 《두문동(杜門洞) 72현록(賢錄)》에도 들어 있는 양(瀁)이 있다. 그 밖의 인물로는 고려 말기의 좌참찬 부(府), 태종 때의 예문관 직제학 덕지(德之), 선조 때의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철견(鐵堅) 등이 있고,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크게 활약한 기필(琦弼) ·균(均) ·경행(敬行) 등도 있다. 전주최씨는 경기 화성(華城), 전북 남원(南原) ·김제(金堤) ·부안, 전남 영암(靈巖) 등에 동족부락을 이루고 있다.
【동주최씨】 철원(鐵原)최씨라고도 하는데, 동주(東州)는 철원의 고려 때 지명이다.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최준옹(崔俊邕)이다. 고려 말기의 최영(崔瑩)을 고비로 조선시대에는 두드러진 인물이 없다. 준옹의 현손 석(奭)의 아들로,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낸 유청(惟淸) 때부터 가문이 번창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들 당()과 선(詵)이 유명하다. 당은 신종 때 문하평장사를 지냈고, 선은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고려 말기의 명장 영은 유청의 현손이며 동원부원군 원직(元直)의 아들이다. 그는 강직청렴한 명장이요 명재상으로서 왜구를 무찔러 전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10여 차례에 걸친 왜구 소탕과 함께 수차례의 내란에 공을 세웠으나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李成桂)의 군사와 맞섰다가 결국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현대의 인물로는 국학(國學)의 대가 남선(南善)이 유명하다.
【해주최씨】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알려진 충(沖)의 아버지 온(溫)을 시조로 한다. 온은 해주 여러 대에 걸쳐 목민관(牧民官)을 지낸 후 해주의 수양산(首陽山) 아래서 세거(世居)했었다. 해주최씨는 고려시대에 많은 학자 ·명신을 배출하였고,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45명을 냈다. 대표적 인물은 동방 유학의 비조(鼻祖)인 충으로, 그가 개경(개성)에서 연 구재학당(九齋學堂)은 한국 사학(私學)의 효시가 되는데, 수많은 영재를 배출하여 오늘날까지 ‘해동공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충의 아들 유선(惟善)과 유길(惟吉) 형제 역시 당대의 뛰어난 인물들이다. 5대손 윤의(允儀)는 예학(禮學)에 밝아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50권)을 편찬하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인물로는 세종 때의 학자요 청백리인 만리(萬理)가 있는데, 그는 충의 12대손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반대한 일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 밖에 시와 문장에 뛰어났던 경창(慶昌),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황(滉)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 배출한 유일한 영의정 규서(奎瑞)가 있다.
【삭녕최씨】 고려 명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최유가(崔兪嘉)를 시조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영의정 2명, 대제학 1명, 문과 급제자 32명을 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항(恒) ·흥원(興源) ·한기(漢綺) 등이 있다. 항은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영의정을 두 차례나 역임하였다. 흥원은 항의 증손으로 선조 때 유성룡(柳成龍)의 뒤를 이어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조선 실학의 거두인 한기는 항의 14대손으로, 영 ·정조 때에 융성했던 실학이 학문으로서 이론적 ·사상적으로 미숙하던 것을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무실사상(務實思想)을 전개하여 실학의 체계를 확립한 학자이다. 사가(史家)들이 그를 가리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가교자(架橋者)’라 평할 만큼 그는 한국 사상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삭녕최씨는 주로 경남지방에 많이 살고 있는데, 특히 사천군 사천면(泗川面) ·정동면(正東面) ·사남면(泗南面) 일대에 특색 있는 동족부락을 이루고 있다.
【강릉최씨】 고려시대의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하고 있다. 《경주최씨상계세보》에 보면, 그는 경주최씨의 시조 치원의 후손인 승로(承老)의 증손이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32명으로 전주 ·해주 ·경주 최씨에 다음가는 숫자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치운(致雲)과 수성(壽城)을 들 수 있다. 치운은 시조 필달의 16대손으로 세종 때의 명신이었으며 특히 형옥(刑獄)에 밝아 왕명을 받고 《무원록(無寃錄)》을 주석하였다. 수성은 치운의 증손으로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시문 ·서화 ·음률 ·수리(數理) 등 다방면에 뛰어난 당대의 기재절필(奇才絶筆)이었다. 강릉최씨에는 시조를 달리하는 일파가 있으니 그 시조는 고려 충숙왕의 부마(駙馬)인 문한(文漢)이다. 그는 고려 말기에 강릉으로 낙향했는데, 그 자손들이 강릉과 충북 충주에 문호(門戶)를 열어 현재 삼척 ·양양 ·평창 등지에 수천 호가 거주하고 있다. 주요인물로는 조선 세조 때 이조참판을 지낸 자점(自霑),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세건(世楗), 인조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응천(應天) 등이 있다.
【화순최씨】 시조는 《조선씨족통보》 등에 고려시대의 최언(崔堰)으로 되어 있으나 《화순최씨세보》에는 계대(系代)를 알 수 없는 언의 원조(遠祖) 세기(世基)로 되어 있다. 세계는 언에서부터 확실히 나와 있다. 그의 아들이 계신(繼臣)인데, 계신의 두 아들 영호(永浩)와 영유(永濡) 대에서 2파로 갈라졌다. 영호는 고려 충렬왕 때 좌우위 보승산원(左右衛保勝散員)을 지냈고, 영유는 공민왕 때 해주목사를 지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당대의 저명한 성리학자로 대사헌(大司憲)이 추증된 영경(永慶)이 있다.
【강화최씨】 고려시대 사복시소경(司僕寺少卿)을 지낸 최익후(崔益厚)를 시조로 하며, 고려 말기∼조선 초기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용소(龍蘇)가 있다. 그는 고려시대에 공조전서(工曹典書) 등을 지냈고, 조선 태조 때에는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잡혀간 본국인 570명을 데리고 나왔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을 거쳐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 태조로부터 ‘관서부자(關西夫子)’의 칭호를 받았다. 그 밖에 중종 때 대사간을 지낸 순(淳), 선조 때의 임진왜란에 전공을 세운 시성(時聖) ·희립(希立) 등이 있다.
【영천최씨】 고려 중기의 공신 최한(崔漢)을 시조로 한다. 한은 전주최씨의 시조 균의 9대손으로, 전주최씨에서 분적한 분파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세종 때 서예가로 유명한 흥효(興孝)가 있다. 그는 홍문관 제학을 지냈으며 예서와 초서를 잘 썼다. 흥효의 후손에서 영천최씨는 12파로 갈린다. 고려 말기의 유명한 인물로는 발명가 무선(茂宣)이 있는데, 그는 원(元)나라의 화약 기술자로부터 기술을 배워 그 제조법을 익혔으며 조정에 건의, 화통도감(火都監)을 설치케 하고 그 책임자가 되어 화포 ·화전 ·화통 등의 화기를 만들어 때마침 쳐들어 온 왜구의 선박 500여 척을 전멸시켰다. 1401년(태종 1) 조선의 화기 보유량은 화약 4근 4냥, 화기 200여 병(柄)이던 것을 그가 관장한 뒤 19년(세종 1)에는 화약 6,900여 근, 화기 1만 3500여 병, 화포발사군 1만여 명이라는 놀라운 숫자로 발전시켰다.
【탐진최씨】 고려 인종 때의 공신 최사전(崔思全)을 시조로 하고 그의 두 아들 변(弁) ·효인(孝仁) 이하를 실전(失傳)하여 세거지(世居地)의 이름을 따서 각파의 중시조를 1세로 삼고 있다. 사전은 예종의 내의(內醫)로서 척준경(拓俊京)으로 하여금 이자겸(李資謙)을 제거케 하고 병부상서에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이 된 인물이다. 각 세거지별 분파를 보면 화성파 ·강진금천파(康津錦川派) ·만경파(萬頃派)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 ·금남파(錦南派) ·만경율리파(萬頃栗里派) 등이며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5명을 배출하였다. 그 외에도 주요 분파로는 수성최씨(시조 永奎:戶長 ·隋城伯) ·수원최씨(시조 尙:戶長) ·우봉최씨(시조 元浩:上將軍 ·門下侍中) ·충주최씨(시조 陞:兵馬使) ·통천최씨(시조 景賢:監察御史) ·양천(陽川)최씨(시조 遠:密直副使) ·개성(開城)최씨(시조 佑達:大相) ·직산(稷山)최씨(시조 弘宰:門下侍郞平章事) ·용주(龍州) 최씨(시조 光:副戶長) ·흥해(興海) 최씨(시조 湖:檢校大將軍) ·양주(楊州) 최씨(시조 億:戶部尙書) ·낭주(朗州)최씨(시조 昕:元輔相) ·초계(草溪)최씨(시조 龍宮:世子太傳) 등이 있다.